이젠 안녕
휴가를 맞아 정신적 여유가 생겨서인지
당장 죽을 병은 아니라서 방치해왔던 스물다섯가지 지병 중
증상이 지속적으로 심각해지다 최근 부쩍 일상 생활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지병 하나를 좀 면밀히 진단받아 보기로 했다.
자랑스러운 의료인의 가족으로 30프로 임직원 디씨가 가능한 언니네 병원에 예약하려고 했는데,
큰 병원이라 그런지 아쉽게도 가장 빠르게 예약 가능한 날짜가 5월이었다.
그래서 일단 동네 병원 중 규모가 있는 산부인과를 큰 맘 먹고 예약하고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밤새 온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데다 눈이 그치칠 않고 계속 내리더라.
병원이 걷기나 차를 타기에는 좀 애매한 거리에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갈 요량이었는데,
(도보 10분, 차량 추자시간까지 포함하면 10분, 자전거 5분)
눈길에다 내리는 눈까지 맞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눈길이라 좀 위험하긴 해도 가까우니까 차로 갈까했는데
안쪽에 주차된 내 차를 빼려면 적어도 세 대가 움직여야 하는 난장판을 내가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다 보니,
귀찮음이 물밀듯이 몰려와 걍 예약 취소하고 담에 갈까 싶었다.
하지만 웬지 느낌이 이번에 취소하면앞으로 또 언제 맘먹고 가게 될지 기약이 없을 것 같아서
눈내리는 험한 길이지만 걸어서 가보자 하고 우산을 쓰고 병원으로 향했다.
내리는 눈을 우산 쓰고 걸어본지가 벌써 백만년마인 듯.
혹시라도 넘어져서 뼈라도 부러지면 안되기 때문에
눈길을 신중하게 내딛고 마침내 병원에 도착했는데 그 병원이 그 병원이 아니더라고.
그러니까 내가 생각했던 위치에는 원래 가려던 산부인과가 아니라 다른 종합병원이 있었고,
내가 가려던 산부인과는 거기서부터 다시 15분을 더 걸어가야 했다능....
지금이라도 집에 돌아가고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도보 15분을 더 걸어 총 25분만에 병원에 도착했다.
난 초음파 정도 간단하게 받고 전문가 소견을 간단히 듣고 갈 예정이었는데,
접수와 예진의 복잡한 절차를 거쳐 의사썜 방에 들어가자
의사 쌤 얼굴 보기도 전에 일단 산부인과의 특수 의자에 앉히고 시작하더라.
일년에 한번 건강검진떄 자궁경부암 검사받는 것도 진짜 하기 싫어서 엄청난 맘의 준비를 하는데
예상도 못하게 당하니 정신적 에너지가 엄청 소모되서 넘나 힘들었어. ㅜ.ㅜ
여튼 의사쌤 왈, 자궁이 굉장히 비대해져 거의 임신 4~5개월 상태라고
일반 자궁의 크기와 내 자궁의 크기를 그림까지 그러가며 몹시 겁을 주었는데
혈액검사 하고 CT 찍어서 시술할지 수술을 할지 정해서 언능 혹을 떼어내야 한다고 했음.
최근 살이 조금 빠지면서 복부 지방 또한 걷어내지면서 배에 뭔가 딱딱한게 만져지길래 혹시 근육인가 했더니,
그게 바로 비대해진 자궁과 혹이었데.
원래 자궁은 조그만거라서 절대로 그렇게 만져질 수가 없는 거라구 하더군.
사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원장선생님의 눈화장이 너무 뚜껍고 정수리쪽 모발이 너무 부풀려져 말려있어서. -.-;;;
뭔가 오바해서 말하시는게 아닌가 싶기도 해지만그래도 동네 산부인과 중 가장 큰 병원이라 대안이 없기는 한다.
(혈액검사비만 20만원 넘게 나왔는뎅 뭔가 과잉진료같기도 하고..희정이네 병원에 물어보까....)
의사쌤이 CT 찍을 상태인지 내과 검진까지 받아야 된다고 해서
그 건물 지하에 있는 연계 내과에 갔는데
역시나 또 고혈압이여서 약을 먹냐고 물어보길래 안 먹는다고 그랬더니 왜 안먹냐 해서
고혈압약은 한번 먹으면 계속 먹어야 한다는데 저는 술 먹어야 되서요...라고 했다가
내과쌤의 폭풍 잔소리를 체감 30분정도 들어야 했다.
여튼 요지는 내가 체감을 못해서 그렇지
고혈압과 협심증과 공황장애와 알콜중독이 사이좋게 손을 잡고 둥글게둥글게 손뼉을 치면서 내 건강을 위협하고 있으며
관리 안하면 40~50% 확률로 심근경색이 오고 심한 경우 죽을 수도 있다고.....
아니 이 분도 뭐 말이 너무 심한거 아니요 싶지만..
CT 촬영을 방해할 수 있으니 혈압약을 일단 먹으라고 약을 처방해주었고
술은 일주일에 한병 정도만 된다고 정해주기까지 했다.
여튼 어쩔 수 없이 CT촬영이랑 시술/수술 때문에 당분간은 혈압약 복용은 더이상 피할 수 없을 듯 한데,
아무래도 이번주 그림터 모임이 과음을 하는 마지막 시간일 것 같다.
1월에는 시술이든 수술을 해야 할 것 같고 그러다보면 또 어영부영 한달은 술을 못먹겠지.
웬지 시술/수술을 하고 나서도 평생 약을 먹어야 관리해야 할 것 같은 것이
술과 함께 한 인생도 어느덧 올해가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을 하니 너무 기분이 안 좋았다.
술없이 5일 이상을 넘겨본 적이 없는 난데
담배 끊은지 6~7년만에 이렇게 술도 보내면
나는 이제 무슨 낙으로 사나.
정말이지 레알로다가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안녕. 나의 두 번째 분신이여...
원래 클린식을 먹으려 했는데
마음이 쓸쓸해져서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동집에 들러 우동을 사먹었다.
이상하게 가끔 기계로 뽑은 우동면과 조미료범벅의 국물이 땡길 때가 있다. 하지만 우동도 막지 못하는 이 서글픔. 눙물의 우동은 맛이 엄서따.

P.S
나는 약먹는거 정말 싫어하는데
일단 대부분의 약이 술을 못먹게 하고,
두번째는 뭔가 내 자연적 상태를 인위적으로 왜곡시키는 것 같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공황장애 약이지.
다소 비관적이고 우울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순 없지만,
나는 나의 복잡다단한 호르몬 분비 체계를 너무나 조아하는 것이다.
나는 항상 내가 자기애가 넘치는지 부족한지 약간 헷갈렸는데,
이번을 계기로 확실히 자기애가 넘치는 쪽이라고 자각함.
얼마나 스스로를 사랑하면 나만의 고유한 호르몬 분비 체계가 넘 소중해서 정신과 약을 못 먹어. 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