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미역 2014. 6. 19. 21:40

6월 연휴쯤이였던가 경주에 내려가 계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허리가 아프다고 하셨다.

대한민국 성인 남녀 중에 허리 한번 안아픈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해서

워낙 연세도 있으시고 해서 그닥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조카의 유치원 등교를 위해 막상 서울에 상경하신 아버지는 증세가 점점 악화되시더니,

한의원에 침도 맞아보고 좀 쉬면 괜찮으려니 하고 시간 보내봤지만

아예 걷지를 못하게 되셔서 나름 명망있는 동네 병원에 가봤는데, 디스크라고 했다.

운동을 매우 심하게 하시던 어느날 디스크가 아예 터져나와서 신경을 눌러서 걷지를 못하는 거라며 당장 수술해야 된다고 했다.

 

울 아부지가 어떤 아부지인가.

70 평생을 매일 서너시간 이상 운동을 거르지 않으신 분이다.

젊었을 때는 테니스로 지역 및 전국을 평정하셨고,

나이가 드시고 나서는 배드민턴으로 주종목을 바꾸셔서

70가까이 되는 요즘도 노인부 배드민턴 도대표로 전국대회 나가서 수상을 휩쓰는 그런 분이셔서,

피지컬한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술 담배를 즐겨하셔서 케미컬한 건강상의 이슈는 있으셨지. 고혈압. 그래서 금연하신지도 한 십년 되셨는데..)

매일 몇시간씩 운동하시던 분이,

아예 걷지도 못하시게 되더니 그 며칠새에 순식간에 늙으시는게 참 가슴이 아팠다.

본인도 다시는 못 걷는게 아닌가 불안해서 얼마나 속이 새까맣게 타셨을지 참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여튼 그리하여

부랴부랴 여기저기 병원을 전전하며 진단을 받다가

디스크 분야로는 최고라는 서울의 모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도 수술 받고 3개월 정도 재활만 잘 하면 예전처럼 운동을 하셔도 된다고 의사가 애기를 했지만,

막상 누워계시는 아부지가 불안감과 갑갑함에 하루하루 신경이 바짝바짝 말라가는게 눈에 보였다.

 

여튼, 이 와중에 수술비가 칠백만원정도 나왔다.

나름 명망있는 동네 병원은 삼백만원이었지만 부모님 건강에 돈이 아까울 자식이 누가 있겠는가.

젤 좋다는 병원 갔고 당연히 자식들이 부담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언니와 내 위주로 수술비를 모아 냈는데,

그게 내심 마음에 걸리셨는지 갑자기 이백만원을 내시겠다고 하는 거다.

 

일흔을 눈앞에 두신 울 아부지의 재정적 목표는 천만원을 모으는거였다.

평생 버신 돈은 자식들과 낭비벽 있는 엄마에게 다 퍼주고

나이들고 소득이 없어지시니 돈 나올 데가 어디 있겠는가.

그 와중에 자식들이 주는 용돈 중에서 낭비벽 있는 엄마의 사치에서 간신히 남은 돈이며 연금이며 알뜰이 모았다가 천만원을 만드는게 목표였고

그 목표가 얼마 남지 않아 매우 희망에 차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와중에 자식들이 당신 수술비 내는게 미안해서 이백만원을 내시겠다는 것도 눈물이 나고,

자식들 키워서 머에 쓰실려고 하냐고, 아부지 천만원 모으는게 목표이시지 않냐고

그거 다 모으시면 나중에 달라고 간신히 아부지를 뜯어 말렸는데,

그래..그럼 그러지 뭐...라고 간신히 겸연쩍게 한발짝 물러서는 아부지가 그 마음이 어떠실런지도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고.

 

아부지. 사랑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P.S

 

물론 울 아버지지만 엄청나게 많은 단점도 있으시다. 특히 성격적 결함이 좀 있으시다.

 

나는 특히나 외모도 성향도 아부지를 꼭 빼닮은 것이 우리 삼남매 중에 아부지의 유전자를 물리적으로 가장 강하게 유전받았음이 확실했다. 다른 가족들 모두가 동의했다. 근데 그게 원래는 되게 싫었다.

아이를 가지고 싶은 많은 이유 중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유전적 개량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무던한 성격의 남자를 만나서 나와 아부지의 유전자에 각인된 천성적인 정서불안을 유전적으로 완화하는 한편,

성장 과정에서 그 태생적 정서불안이 해소될 수 있도록 각별히 신경 쓰면서 많은 사랑을 주면,

나보다 좀 더 나은 인격체로 자라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 기회가 평생 오질 않을 듯 하여 심각하게 고민되는 요즘인데...

 

여튼 하루종일 누워서 심심하실 아버지에게, 노유진(노회찬, 유시만, 진중권)의 정치 까페이니 하는 팟캐스트 듣는 법을 알려드렸더니 엄청 좋아하셨다. 원래 지난 대선때부터 나꼼수 들으시라고 엄청 그랬는데 그때는 마냥 손사레 치며 그런거 안듣는다고 싫어하시더니 막상 할일 없이 누워만 계셔야 하니 그 와중에 엄청 재밌으셔했다.  심지어 아부지가 소일거리로 하시는 인터넷 기사에 댓글 달기 놀이 중 아부자가 단 댓글 내용이랑 노유진의 정치까페에서 유시민이 한 비유랑 똑같은 부분도 있다며 자랑스러워하셨다. 좋아하실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좋아하시다니.

 

아빠는 정말 또다른 나였으며 여러모로 나보다 나은 인생을 사신 것 같다.

 

사실 아부지도 나름 유전적 개량을 하셨다. 낭비벽이 심하지만 성격과 대인 관계는 매우도 무던한 엄마 만나서 물리적으로 유전적 요소도 완화하셨고 투박하긴 하지만 아부지 성장 과정에 비할바 없이 나름 자녀들에게 사랑도 주셨는데 그 결과가 이모양 이꼴의 나라니.

 

아부지, 정말 죄송하고 사랑합니다. ㅜㅜ

 

P.S 2

 

유전적 개량이라는게 정말 랜덤인가바.

울 언니랑 내 동생은 엄마 유전자가 강해서인지 정말 성격이 무던하거덩.

근데 그 정서 불안이며 신경 쇠약이며 다혈질이며 하는 건 내가 죄다 물려받았어.

그니까 A+B가 C가 되는게 아니라 A+B는 B,A,B가 나온거야.

사회진화론적 관점에서 사회에 적응하기 힘든 나같은 존재(A)는 도태되고

울 언니나 동생같은 B,B가 더 안정적으로 번식을 하게 되는...

 

먼말인지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