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1. 귀향
원래는 경주에 내려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어차피 차례 안지낼거고
조만간 서울 올라올거니까
내려오지 말고 차비 아껴서 돈으로 달라고 해서
(원래도 당연히 용돈 드리지만,
이번 달에는 매달 드리는 용돈 + 추석 맞이 특별 용돈 + 미귀향 추가 용돈 요렇게 3가지 명목으로 드림)
2. 생산성 압박
여튼 연휴 내내 서울에 있게 됐느데
새삼스러울 것도 없구먼,
짦은 연휴에도 불구하고 진짜 할일 엄고 드럽게 심심해따.
우선 아침에 운동하러 올팍에 갔다.
평소에는 한바퀴 도는 코스를 두 바퀴 돌고
벤치에 앉아 책을 좀 읽다가 집으로 돌어와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즐겨보는 모 유튜브가 추천한 노브랜드 짜장라면을 먹었는데
계란 후라이를 두 개를 올려 먹었다.
라면을 먹고 평소라면 안했을 설겆이까지 했는데도 시간은 11시가 안되서
술을 먹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뭘 할지 모르겠고 더럽게 심심했다.
사실 학술지에 투고할 논문을 좀 충실히 써야 할 것 같아서
외부 일거리 제안 들어온 것도 거절했는데
돈이나 학위 등 아무런 보상이나 대가가 없는 일을
게다가 아무런 외부적 압박 또한 없는 일을
100프로 순수한 자발적 의지로 해나갈 것이라고 생각한 스스로가 너무 나이브했다.
내가 나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다.
나란 사람...알면 알수록 생각보다 훨씬 더 의지라곤 엄...
이렇게 논문을 안쓸 줄 알았으면 그냥 알바거리라도 받아서 했으면
이렇게 무용히 시간을 버리진 않았을텐데.
배민 배달이라도 해야 하는게 아닐지 심각히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이렇게 누워있느니
배달 하면서 운동도 하고 돈을 버는게 생산적이지 않나 싶은 것이
배민 배달을 하면 안될 이유를 아무래도 찾을 수 없었다.
지난번에도 배민 배달을 하려고 배민커넥트 가입까지 했는데
배민 커넥트 하려면 반드시 들어야 하는 온라인 교육 과정을 안 들어서 흐지부지 됐더랬다.
여튼 뭔가 막연히 그건 아닌 것 같아서
논문을 한자라도 써보려고 동네 커피빈으로 갔다.
요즘엔 주로 동네 까페 가서 작업을 했는데
추석 연휴까지 가는게 웬지 까페 주인 보기 민망해서 익명성이 보장되는 대형 프랜차이즈 까페로 갔다.
여기는 박사논문 쓸 때 한창 열심히 왔떤 곳인데
어쩌다보니 되게 오랜만에 오게되었는데
추석 연휴라 그런지 정말 사람이 없었다.
역시 동네 조그만 까페에서 찾을 수 없는 널찍한 공간에 적당한 온도와 조도와 소음 등등의 쾌적한 환경이 아주 좋았다.
고정멤바 할머니들이 드글대는 작은 동네 까페도 나름 정겨운 맛이 있지만
작업하기에는 역시 여기가 더 좋은 것 같다.
3.
비록 논문을 쓰러 왔지만
논문 쓰기 전 딴 짓을 최소 한시간 이상 하는 것이 인지 상정.
반정도 읽던 소설을 조금 읽다가 하려고 책을 펼쳤는데
역시 잼나서 끝까지 읽었다.
이번에 읽은 건 이건데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멀쩡히 대학을 나오고도 불안정한 정서와 성격 파탄으로
어느 조직에서도 적응을 못하는 사회부적응자인 30대 여성과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조직에서 소외되어 은퇴만을 바라보고
무기력하게 하릴없이 하루하루 시간을 떼우는 한때는 노련했을 듯한 50대 여성 형사가 주인공이다.
특히 여성 형사 캐릭터가 대단히 매력적이었는데
영화든 소설이든 여성성이나 성적 매력을 부각하는 것이 아닌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 자체가 남성 캐릭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지 않는데다가
특히 가정 주부 내지는 어머니 외의 역할로써 50-60대 이상 중장노년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 자체를 찾기가 쉽지 않다.
동년배의 그날이 멀지 않아 그런지 이런 캐릭터를 아주 좋아하는데,
중년여성킬러가 증장하는 구병모의 파과가 이런 보기 드문 작품 중의 하나여서 재밌게 읽었다.
결국 어머니가 되지 못한 중년 여성은 사회에서 정서적으로 대단히 소외되고 있다고 이 연사 강력히 주장합니다!!!.
4.
연휴 첫날은 당연히 낮술과 시작을 해야지.
일년쯤도 전에 올팍 근처에 큰 와인샵이 생겼는데
요즘에는 편의점 와인도 워낙 구색이 나쁘지 않아서 별로 안가봤더랬다.
그런데 마침 커피빈 근처라 낮술로 마실 와인을 사려고 함 들려봤음.
행사하는 와인은 가격이 괜찮아서 낮술로 마실 거는 일단 이걸 고름.
그냥 무난한 데일리 와인이었는데 생각보다 바디감이 약했음.
사실 싸구려 와인은 어쩔 수 없이 맛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내가 기대치가 과한게 맞음.
무난하니 괜찮았음.
아니 글쎼 와인도 와인이지만 위스키도 무지하게 잘 갖춰놨더라.
종류도 다양하고 가격도 괜춘한 것 같아!
하이볼 만들어 먹으려고 하남 이마트 트레이더스까지 사러 갔는데
없어서 허탕쳤던 짐빔과 잭다니엘이 종류별로 이쁘게 진열되어 있었음.
아니 지척에 이렇게 괜춘한 데를 놔두고 왜 하남까지 갔던거야!!
와일드 터키 종류도 많음.
추억의 와일드터키. 태어나서 첨 마셔본 양주였음.
양주 한번도 못 마셔봤더 했더니 상규가 사줬었는데.
여튼 여기는 위스키 뿐 아니라 맥주, 전통주 등등 다양한 주류들을 팔고 있어서
아무래도 매우 단골이 될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 .
아니. 내가 분명 혼술은 안하기로 백만번째 다짐했건만
이렇게 좋은 주류 판매점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악.
5.
낮술 안주를 위해서 시장에 들렀다.
그래도 추석인데 전을 좀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시장에서 삼색전 3개, 동그랑땡 3개, 고추전 2개를 샀더니 8천7백원이 나왔다.
명절을 맞아 맛있는 것도 먹어야 하므로 LA갈비 재워놓은 것을 샀다.
5줄을 샀는데 2만2천원이나 나옴. LA갈비는 맛있는데 넘 비쌈.
LA갈비와 같이 먹을 양파와 새송이 버섯을 사고 쌈을 싸먹을 야채도 사고 했더니만
이래저래 5만원 정도 쓰게 되었다.
아니 이정도면 그냥 배달 시켜 먹는게 나을 려나.
그래도 전도 LA갈비도 맛있었다..
6.
결국에는 배민커넥트 교육을 완수하고 콜 대기를 받아보기로 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느니 소소히 술값이라도 벌어야겠어.
내가 미적거리는 사이에 누군가 비슷한 주제로 논문을 이미 실었더라.
논문은 무슨 논문, 이따 술먹고 코노나 가야겠다.
배달과 논문과 낮술과 코노...
내 인생은 중심을 어디에 둘지 모른채 여전히 불안정하고 혼돈스러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