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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심난

물미역 2020. 1. 11. 13:03

동생의 와이프, 그니까 올케네 집은 딸기 농사를 짓는다. 

그래서 매년 이맘때쯤 동생은 언니와 나에게 최상품의 딸기를 한박스씩 보내준다. 

한 박스에 요런게 4팩 들어있음.

 

동생이 말하기로는 요런 품질의 딸기는 수확량 자체가 많지 않다고도 했따.

 

나는 과일 중에서는 딸기를 제일 좋아하지만 원체 과일을 찾아먹지 않는 편이다. 

맵고 짜고 기름지고 뜨끈뜨끈한 음식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차고 달고 수분 많은 과일에는 도통 손이 가지 않다보니, 

집에서 과일 챙겨먹는 습관 자체가 없어서 

그 좋은 최상품의 딸기를 냉장고에 방치하다 버리기 일쑤였다. 

몇 번은 회사에 가서 팀원들과 나눠 먹은 적도 있었는데, 

팀원들은 돈주고 사기도 어려운 완전 좋은 딸기라고 감탄하곤 했어서, 

딸기를 버릴 떄 동생에게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시들어서 버리기 전에, 

미리미리 팀원들에게 나눠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가까이 사는 사람들 중, 

언니는 동생에게 딸기를 받았고, 

가까운 동네에 사는 애 셋 친구는 시댁이 딸기 농사 지어서 내 딸기 선물이 크게 달갑지 않을 것이라, 

팀원들에게 나눠주기로 했다.

회사에서 줄까 하다가 왔다 갔다하는 와중에 딸기가 상할 수도 있고, 

최대한 신선할 떄 주는 게 좋을 듯 해서, 

마침 팀원들이 서울 동쪽의 위성 도시에 살고 있어서, 

그냥 내가 직접 집으로 가져다 줘야지 했더랬다.

사실 그 전에 팀원들 집을 가 본적도 없고, 당연히 집에 왕래하고 그런 사적인 관계도 전혀 없고, 

팀장이 주말 아침부터 팀원들 집에 들이 닥치는 것도 듣도보도 못한 상황이라

뭔가 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라는 의문이 자꾸 머리를 맴돌아서 이래도 되는 것인지 여러번 검토했따.

 - 결국 이 딸기를 다 먹지 못하게 버리게 될 것이다. (경험적으로 확실)

  - 그렇게 되면 딸기를 보내 준 동생과 사돈 어르신댁, 그리고 딸기에게 엄청 미안하 일이다.

  - 주변에 딸기 나눔할 사람이 없다. 

 - 팀원들은 이 딸기를 엄청 맛있게 먹었따. 그 중 일부는 돈주고 사고 싶어하기까지 했다.

  - 딸기는 이동 중에 상처입고 상하기 쉬운 음식이다. 

  - 팀원들 집으로 직접 가져다 주자.

  - 애초에 동생에게 딸기를 보내지 말라고 하거나 적게 보내라고 하면 될일이 아닌가?

  - 아냐아냐. 나도 현지 농산물 보내주는 일가 친척이 한명쯤 있었으면 좋겠어. 게다가 엄청 맛난 딸기라구!!

여튼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인 결정이 아닐 수 없어,

차가 안 막히는 아침 시간대에 잠깐 주고 올 요량으로, 

토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팀원 A가 사는 G시로 향했다.

가는 길에 팀원 A에게 카톡도 하고 전화도 했는데 도통 받질 않아서,

비상 연락처로 저장해둔 팀원 A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팀원과 통화해서 주소를 알아냈다. 

주말 아침부터 팀장이 전화하는게 몹시 미안하기도 햇지만, 

그래도 맛있는 딸기를 주러 가는 거니까 괜찮을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팀원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슬쩍 딸기를 건내주는데, 

팀원이 사과 6개가 든 봉지를 답례로 주었다. 

어어.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 좀 당황했따. 

사실 이렇게 되면  주말 아침부터 팀원을 번거롭게 하고 팀원네 살림까지 축낸게 되버려서 엄청 미안해지는데 .

게다가 나는 사과 잘 안 먹는데. 

그래서 진짜 받고 싶지 않았지만 주말 아침부터 지하주차장에서 안받겠네 어쩌네 실랑이 하면 더 민폐가 될까바 그냥 군소리없이 일단 받아가지고 팀원 B가 사는 W시로 향했따.

사실 W시나, G시나 다 서울 동쪽이라 가까울 줄 알았는데

G시에서 W시는 꽤 시간이 걸리더마.

게다가 G시에서 만난 팀원 B도 고맙다며 귤 봉지를 답례로 주었따.

앞서 말했든 나는 과일 먹는 습관이 들어 있지 않아

우리 집 냉장고에도 귤이 썩어 넘쳐 언니네 집에 갖다 버리는 판국이었지만 

실랑이 하기 미안해 귤봉지를 받아가지고 마침내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이 내내 찜찜했따. 

괜히 주말 아침부터 그들을 귀찮게 하고 살림살이까지 축낸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 우리 팀원들이 나보다 훨씬 더 사회화 되어 있고  경우 바른 성숙한 사회인이라는 점을 내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내가 집에 딸기가져다 준다고 어멋. 감사여~하고 딸기만 냉큼 받아챙길 것으로 생각했던게 나의 실책이다.

주말 아침부터 한시간 반이나 걸려 서울과 동쪽의 위성 도시들을 돌아다니느라 소요된 나의 시간과 기름값들,  

여러 사람들을 나조차도 생소한 상황에 개입시켜 괜한 정신적 에너지, 말하자면 신경을 쓰게 하고, 

그들 가정의 소소한 식료품까지 축내게 했다는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할때 난 당최 뭘 하고 다닌건지 모르겠다.

경제성과 관련자들의 심신 안정 등을 종합적으로 생각할 떄 그냥 냉장고에 방치하다 버리는 편이 더 효율적인게 아니었을까 하고 심난해지기만 했다.

그냥 나는 최상품의 딸기가 최대한 신선할 떄 그 딸기를 원하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맛있게 먹었으면 했던 것 뿐인데,. 

세상은 항상 그렇게 단순하게만 돌아가지 않는 것 같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 항섭형 네 집이 이 근처였군화!

담에는 항섭형네 집 갖다 주면 되겠고마.

내년에 갖다줄꼐염. 1년만 기다리세염.

딸기는 올해도 정말 맛있었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