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하다.
#1.
같이 박사 논문을 쓰기 시작한 연구실 후배는 아직 30대 초반이다.
1차 지도위부터 시작해서 중간발표-2차 지도위까지는 나란히 마쳤는데,
그 친구는 2차 지도위를 통과해서 6월에 지도의 심의를 받고,
나는 2차 지도위에서 매우 지당하신 교수님들의 지적에 쫄딱 지도위를 미끄러지고,
한 학기가 더 미뤄지게 되었다.
이 친구가 풀타임 학생에다 교수님 조교여서 같이 논문 준비를 하면서,
일정이라든지 행정적인 부분에 대해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받았더랬는데
둘이 길이 갈리고 혼자 진행하려니 지도위나 심의위 일정을 도통 어떻게 짜나가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걸 물어보다가 6월말에 중요 일정은 거의 끝난다길래,
무심결에 "이야~느무느무 좋겠따. 음청 부럽다."라고 했더니.
그 칭구가 약간 파르르 하며 "뭐가 좋아여. 언니가 훨씬 잘 나가시잖요. 저는 언니가 훨 더 부러워요. 저랑 바꿀라면 바꾸실래요"라고 하는데 잠깐 할 말이 없어서 찐으로 당황했다.
물론 내가 뭐 잘 나가서 그러는게 아니라,
6070대만큼은 아니더라도 4050대들도 현재의 젊은 세대에 빚을 지고 있는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연하고 추상적이던 부채감이 후배의 입을 빌어 매우 구체적인 항의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근데 생각해보면 개네집이 나보다 훨 질 살아서 개는 집에서 사준 아파트 보유자기도 해서 개가 나보다 더 잘사는건데....게다가 젊고 이쁘고 샇 날이 창창한데 뭘 그리 발끈하기는....
그래서 쪼큼 벙쩌 있다가 "정말 좋은 포인트라서 할말이 없네. ㅋㅋㅋ 그래도 너는 젊잖아! 나는 나이들어서 만사 다 힘들다"라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 칭구도 눈치 빠른 아이라 논문 끝나고 회사 근처 갈테니 맛있는거 사달라고 해서
정말 비싼 거 사주겠다고 훈훈하게 통화는 마무리됐지만,
어른답지 못한 내 모습아 정말 한심했던 기억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
#2.
페이스북에서 누군가 좋은 글이라고 추천해준 글을 보면
그 글을 읽기 전에 작성자 이력부터 먼저 살피곤 하는 내 스스로가 속물같다.
게다가 작성자가 알고보니 내가 별볼일 없게 생각하던 전 회사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고
그 글을 추천해준 사람의 안목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 내가 한심하다.
언제까지 좁디좁은 우물에서 우울과 불안을 잔뜩 지고 살아갈 것인가.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은 거의 없지만,
불확실성이 제거되고 인생의 변화 가능성이 감소한다는 것은 그나마 장점이라 할 수 있다.
40대 초반...아니 30대까지만 하더라도
가능하다면 20대로 돌아가겠냐는 부질없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저없이 예스였다.
20대로 돌아간다면 놀지 말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학점 관리도 잘 하고 어학연수도 다녀와서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멀쩡하게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끄야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40대가 나니 일단 너무 고단해서 인생을 다시 살 엄두가 안나고,
20대로 돌아간다고 한들 나라는 인간이 성실하고 착실하게 살 리가 없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사람은 도통 변하질 않는 법이며 나라는 사람도 이 법칙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을 뿐이다.
#3.
내가 현재와 같은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게 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내 성격 탓이다.
나는 워낙 자존감이 부족해서
다른 사람들 눈치를 많이 보고 욕 먹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사람들 만나는 것을 불편해하고 낯을 많이 가리고
그러다보니 내 쪽에서 사람들에게 먼저 연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마디로 인간 관계를 잘 만들어 나가지도 그나마 있는 관계를 잘 유지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불러주지 않는 이상 집에만 있고 ,
다들 자신만의 가족들이 생기니까 불러지는 사람도 거의 없고
잔치는 이미 한참전에 끝났는데도 돌아갈 곳이 없어 혼자 쓸쓸히 파티장에 남아 있는 꼴이다.
나이들어 뻔뻔함이 좀 생길법도 한데 역시나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 법이라,
확진자들의 왕성한 동선에 사람들이 나와는 달리 얼마나 활발하게 사는지에 대해 매번 깜딱깜딱 놀라며,
별수없이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하게 꾸역꾸역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큰 고비 없이 살아오고 있는데 최근 나의 이런 성격에 다소 위기가 닥쳤따.
하나는 당연히 이 회사에서 혼자 일하다 보니 외로움이 극한으로 치달은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논문 때문에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문을 쓰다보니 전문가 심층 면접이 필요한데
원래는 예전 회사 친한 사람들이랑 연구실 후배들 위주로 간단히 해서 떼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박사 학위란게 그렇게 호라호락한게 아니더라구.
우선 지도위에게 욕먹지 않을 정도의 전문가들을 섭외해야 하는데 ,
그러다보니 지도교수님이 추천해주신 썡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아니 이를 어째.
게다가 일하게 알게 된 사람들 중 그나마 친한 사람들도 섭외를 하긴 하는데
사실 뭐 일하다 오며가며 자주 보긴 했지만,
오로지 내 개인적 이유로 뭐 부탁하려고 연락한 적은 한번도 없었던지라,
그건 또 그거대로 곤혹스럽더라.
아오. 스트뤠쓰 받아. ㅜ.ㅜ
나도 별반 잘 모르는 대학원 후배 요청으로 40대 1인 가구의 경제 상황에 대한 연구 뭐 이런 거 심층 면접 인터뷰 해준 적 있는데,
잘 모르긴 해도 같은 대학원 후배 일이라니 열씨미 했는데,
그때도 잘 모르는 나에게 와서 이런저런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는
어린 친구 보면서 엄청 감타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왜 이렇게 사람이 다 어렵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