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만한 하루
어제는 내 인생에서 아주 보기 힘든 꽤나 충만한 하루였다.
내가 또 넘 감정적이 되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봐
글 써놨다가 하룻밤 묵혀두고 다시 봐도 참 좋은 하루였어.
1.
출근하기 전 아침 일찍 치과 치료 함.
건강을 최우선시 하는 내가 뿌듯함.
(평소 구강 건강 관리에 소홀해서 결국 치과까지 가게 된 건 잠시 접어두자......)
치료 중에 의사 쌤이 몇 시까지 출근하면 되요? 라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한..9시 반 정도요...라고 애기해는데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거덩.
그때만 해도 사실 나는 뭐 출근 시간 유연한데 괜히 찔려서
넘 타이트하게 말했나 해서 싶어서 그런 줄 알았지.
2.
치과 치료 마치고 사무실 출근해서,
광화문에 있는 점약 멤바들에게 점약 일정 확인을 했다.
멤바 중 1인이 어제 점약 깜빡했다고
나한테 일 땜에 광화문에 올 계획이었냐고 하더라.
그래서 그런 건 아니구 걍 너네 보러 갈라구 했지...라고 말할 때도
뭔가 위화감이 느껴지긴 했는데 뭔지 모르겠더라.
점약은 금요일로 다시 잡아따.
3.
여튼 계속 쌓이는 위화감을 애써 외면하며
오전까지 주무 부처에 넘겨야 하는 문서 겁나 작성하면서
자료 찾다가 위화감을 정체를 깨닫고 말았따!!!!!
오전 9시30분부터 광화문에서 주무 부처가 주관하고 내 개인적으로도 엄청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는 거슬...ㅜ..ㅜ
어제 오후에 부처에서 요청한 일 쳐내느라 정신이 없어서 회의 일정을 까맣게 잊고 있었음.
물론 캘린더에 기록도 했놨고 캘린더도 확인했지만 정보가 눈에 안들어왔음.
그래서 내내 치과며 점약이며 일정 조율하면서 위화감이 느껴졌던거야. ㅜ.ㅜ
근데 말이야,
원래 이 정도면 진짜 세상이 무너져라 엄청 자책했을 거거덩.
미참석한 회의로 인해 손상될 나의 평판, 그로 인해 일거리가 끊기고 말거라는 파국적 상상과 절망감으로 이어지는게 좀 패턴이거덩.
근데.....잠깐 패닉에 빠졌다가....아우..머 어뜨케...할 수 없지...라는 생각이 곧 들더라.
뭔가 멘탈 레질리언스가 좀 올라온 느낌.
그간 내 정신상태가 어느정도 병리적인 상황이었던게 맞긴 맞어.
4.
겁나 일하다가 점심 때를 놓쳐서 느지막히 동네 맛집으로 갔음.
원래 웨이팅이 있는 곳인데 늦은 점심이라 그런지 웨이팅 없이 입장함.
내가 요즘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푸는 경향이 더 심해져서인지,
혼자서 메뉴를 호기롭게 2개나 주무했지 모야.
근데 역시 하나 먹으니 다른 거 하나는 도저히 못 먹겠어.
그래서 포장 좀 해달라구 했더니 여기는 가게 정책상 포장이 안된데.
거의 손도 안된 메뉴 하나를 온전히 포기하는게 넘 아까워서,
서빙 직원에게 내가 근처 다이소에서 위생백을 사올테니 잠시 접시를 그대로 둬 주세요..라고 했찌.
마침 집에 위생백이 똑 떨어져서 원래 살려고 했거덩.
근데 서버가 주방을 슬쩍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안에서 알면 한소리 하니까 일단 테이블로 돌아가 계시면 제가 위생백 가져다 드릴꼐요' 라고 속삭였어.
그러면서 잠시 후에 나에게 비밀리에 위생백을 슬쩍 지어주면서 티 안나게 가져가세요...라고 언질을 주었음.
그렇게 007 비밀작전 수행 뺨치게 은밀히 남은 음식을 포장해 온 내가 넘나 개뿌듯함.
5.
상담하러 가서 나를 빡치게 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애기했더니
오늘도 상담쌤에게 한소리 들었지만 얼추 심리기제 정리에 진전이 있어서 참 유용했음.
한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더라.
일단 현재까지 정리된 기제는 다음과 같아.
애정 결핍 -> 과도한 인정 욕구 -> 조직에 충성/상사 요구사항 복종이 절대선이라는 내면화된 가치 -> 나 스스로의 요구/생각을 표현 안함 -> 과로 -> 피해 의식(피해자 코스프레) -> 보상 욕구 비대 -> 감정적 반응
뭐 대충 이런건데,
이런 심리적 기제로 인해서,
상대방이 내 상황을 잘 모르고 악의없이 하는 요구를,
내가 애기를 안하고 일단 따르려고 하니까 부당한 요구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지.
상황 인식에서 이런 심리 기제가 우선 발동하니 쉽게 감정적이 되고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는데 유연성이 떨어지고 내가 나 스스로를 괴롭히는 방향으로 자꾸 사고하게 되고 그런거래.
이번주에도 사무관이 내일까지 자료 달라고 하면 그건 좀 어렵겠다고 애기를 안하고, 일단 맞추려고 하는 내가 문제라는 거지.
내 생각대로 지난 회사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의식적으로라도 내가 원하는 걸 찬찬히 들여다보고 그걸 상대방에게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 된데...
사실 이런 애기는 백만번쯤 듣기는 했지만 이번 세션에서 웬지 확실하게 각성이 되었다랄까....
아...근데 넘 늦게 깨달았어. 나이 오십에서야 이런 훈련이라니.....
6.
상담을 마치고 다음 일정인 당근 영어 모임에 갔다.
1년 전에 여기 처음 갔을 때 나를 엄청 조아해주던 50대 언니야들이
웬일인지 반년 이상 모임에 나타나질 않아서 어찌 살고 계신지 엄청 궁금했는데
오늘 진쫘 오랜만에 언니야들이 나오셔서 엄청 방가웠찌 모야.
첨 이 모임 왔을 때 내가 회사 땜에 힘들어서 한참 자존감떨어져 있을 떄라
부티나는 언니야들이 나를 마냥 좋게 봐주는게 참으로 위안이 되었더랬거덩.
역시 다시봐도 참 좋은 언니야들이야.
돌이켜보면 내가 친하게 지내는 손위 여성들이 거의 없는데,
참 괜춘한 사람들이당.
7.
그리고 마침애 오늘의 하이라이트!!!
드디어! 드디어! 오십년만에 드디어 완벽한 이상형을 찾았지 모야!
오늘 모임에 첨 나온 회원인데,
하얀 얼굴이지만 탄탄한 체격, 순둥순둥하면서 구김살 없는 밝은 에너지가 넘나 내 스타일인거야.
원래는 내가 좋아하는 유형이라고 깨닫게 된 사람도
비슷한 이미지인데 애가 좀 내성적이라 그런지 아주 미묘하게 어두운 면이 있거덩.
사실 웬만한 사람은 잘 캐치를 못할 텐데,
나는 워낙 정신세계가 뒤틀려 있으니 알아 볼 수 있었지.
근데 이 신규 회원은 훨씬 더 에너지가 밝아서 더 좋더라구. ㅎㅎ
아니 뭐 그렇다고 뭘 해볼라구 그러는 건 당연히 아니고,
그냥 내 이상형이 이런 사람이구나하고 깨닫고 만나게 되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거지 뭐.
모르고 죽는 것 보다는 낫잖아.
물론 솔직히 남편감으로써인지 아들래미감으로써 좋은 건지는 애매한 감이 없지 않긴 해. ㅎㅎ
여튼 차자따. 내 이상형. ㅎㅎ
8.
박봉이라도 사회적 역할이 주어지고 안정적인 소득원도 생기고,
낯선 환경과 역할에 조금이나마 적응이 되니까
정신적으로도 좀 안정이 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아 다행이다.
9.
모든 일정을 마치고
10시가 넘어 집에 들어와서 술만 안 마셨어도 더욱 좋았겠지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