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근무의 날
오늘은 재택을 하는 날이다.
나는 보통 월욜에는 주말에 놀았다는 죄책감 내지 압박감 때문에
아침 7시에 사무실로 출근해서 저녁 8시에 퇴근하고
화욜은 아침에 PT를 받고 10시 출근해서 8시 퇴근으로 그나마 정시 근무를 하는 편다.
월, 화는 보통 같이 밥먹을 사람이 없어서 밥먹으로 갈 시간도 없이 바빠서 뭐 사다 자리에서 혼자 먹곤 한다.
이러다보니 월, 화가 넘 지쳐 보통은 수요일에 재택을 하는데 틈틈이 놀면서 최대한 여유를 가지려고 한다.
그런데 재택이라는게 참 애매해서 너무 늘어지거나 아니면 너무 빡세게하거나 극단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어 중심을 잡기가 어렵긴 하다.
오늘은 미세먼지 없는 맑은 날이라서 아침 6시에 일어나자마자 여유롭게 일단 올팍을 한 바퀴 돌았다.
개운해진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동네 영어 선생님 시강을 들으러 갔따.
원래 예전 회사 다닐때는 회사에서 한달에 15만원씩 영어 학습비를 지원해줘서
순전히 돈이 아까워서 7~8년 정도 꾸준히 영어 회화 과외를 받거나 전화영어라도 했었는데
여기 와서는 일단 회사가 영어 학습비 지원을 안해주고 따로 영어 과외 받을 시간에
회의 녹음한거라도 다시 들어봐야 하지 않겠나 싶어 한동안 안했었는데
역시 옆에서 누가 하라고 자꾸 찌르지 않는 이상 허구한날 누워있는 나의 특성답게 그냥 유튜브나 처벌 뿐이었기 때문에
돈을 들여 영어 선생과 주 1회라도 영어 공부 시간을 가질라구 한다.
이로써 내 일상을 돌봐주는 내 주위의 전문가는 총 4명이 되었는데((1) 가사도우미 (2) PT 트레이너 (3) 영어쌤 (4) 피아노쌤) 전문가 비용으로만 이러저래 한달에 한 100만원정도 쓰는 것같다.
나 하나 돌보는데 월 백이나 쓰다니 이것은 과소비를 떠나
중년이 되도록 자기 몸도 못 돌보로 1인가구 살림 하나 건사를 못해서 죄다 돈 들여 해결하고 있다니
너무 한심하고 pathetic 한 상황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려다가
하지만 내가 뭐 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애 키운다 생각하면
내 가정형편에 베이비시터랑 교육비로 월 백정도 쓸 수 있지 모.
월 백이 모야. 애 때문이라면 이삼백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나이가 먹었다 뿐이지 정신 연령이나 자기 위주의 상황 인식과 요동치는 감정 상태등등을 고려할 떄 사실 어린애랑 큰 차이가 없다.
초딩 6학년인 조카가 나보다 더 독립적이고 성숙하고 어른스러우며 결정적으로 정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애 키운다 생각하고 나에게 돈을 쓰는 것에 별로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내게 돈쓰는 건 아까워도 자식이 있다면 자식 건사하고자
베이비 시터 쓰고 학원 보내고 하는 데 쓰는 돈은 아깝지 않지 않느냐 말이지.
그래서 오늘 점심은 재택 근무할 때 항상 가는 가성비 쵝오 7천원 동네 백반집에서 먹거나
집에서 급하게 휘리릭 라면을 끓여 먹거나 하지 않고
네이버 평점 4.8에 빛나는 동네 초밥집을 갔으며
'모듬 초밥' 내지는 '점심 특선' 같은 걸 안 먹고 무려 만오천원짜리 스페셜 초밥을 먹었따.
여튼 난 이제 가성비 안 찾고 뭐든 '스페셜' 내지는 '특' 내지는 '프리미엄'이 들어간 것만 소비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PT를 프리미엄으로 끊은 건 정말 잘한 일이었따.
비록 트레이너가 예상보다 시큰둥 한 편이 좀 실망스럽지만 뭐 그럴수도 있지.
야심차게 시킨 오늘의 스페셜 초밥은 양이 넘 많아서 60%정도만 먹고 나머지는 포장해왔다.
이 집은 괜춘했는데 생선을 엄청 좋은 것을 쓰는 것 같지는 않고 스페셜 초밥도 구성이 엄청 좋은 것 같지는 않다.
식사 메뉴를 시키면 나오는 연어 조림, 샐러드 등등이 신선하고 맛있으며 계란찜도 줘서 구성이 괜찮으므로
스페셜 초밥보다는 연어 덮밥이 가성비가...아니...구성이 좋을 듯.
오는 길에 동네 단골 커피숍에서 2천원짜리 아아를 마셨따.
아니 가성비 때문이 아니라 이 커피숍이 맛이 있다니깐. 맛이 있어서 그래. 가성비 떄문에 아니냐. 맛있다구.
요약하자면 자식낳고 알콩달콩 내지는 지지고 볶고 살고 싶지만
그러질 못하니 자신 스스로를 자식처럼 생각하고 소비하겠다는건데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상황이 pathetic하기는 마찬가지지 뭐.
그냥 소비 결정 로직의 효율화를 위해 룰을 하나 추가했다 정도로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