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휴 전날 직원들은 오전 근무만 시키고 퇴근시켰다.
공공기관에 다닐때도, 외국계 기업에 다닐 때도,
연휴 전날에 조기 퇴근을 기대했었는데
꼭 당일 오후가 되어서야 부서장 재량으로 비공식적으로 알음알음 일찍 가던 기억에,
이번에는 그 전날 오전 근무 정책을 발표하였다.
아직도 나는 중간 관리자와 대표자의 그 어딘가를 맴돌고 있는 듯.
여튼 세상에서 가장 맘이 편한 날은 연휴 시작 전날 오후 퇴근길 인 듯.
2.
업무를 하다보면
얼굴과 이름이 아예 가물가물해서,
평소라면 평소 아예 연락도 하지 않았을
애매하게 알고 있던 사람과도 직접 연락을 할 떄가 종종 있다.
나는 그들을 잘 모르는데
그들은 이래저래 나의 행보를 알고 있더라.
그러면서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근황을 물을떄마다,
아, 진짜, 넘 바쁘고 힘들어요..라고 징징대는데,
한결같이 아니 왜요...거기 좋지 않아요...라고 되묻는 경우가 많아,
위화감이 느껴진다.
위화감은 반드시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경계해야 할 신호라서,
나는 이렇게 엄청 힘들고 바쁜데 그들은 이 포지션을 개꿀이라고 보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 나도 본격적으로 일하기 전에는 완전 개꿀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
사실 맘먹고 여유를 가지자면 끝없이 여유를 가질 수도 있기는 해.
개꿀일 수 있는 포지션을 지옥의 고난길로 기어이 만들고야 마는
내가 여러모로 문제다. 매사 그렇듯이 말이다.
3.
명절 연휴에 서울에 있을 때는 보통 언니네 집에 가서 밥을 먹는데,
이번 설날에는 우리 집으로 언니네 가족이 왔더랬다.
근처 가성비 좋은 횟집에서 회를 뜨고 나의 특제 돼지갈비구이를 만들어주었는데,
입맛 까다롭기로 소문난 형부와 조카가 맛있게 먹어서 어찌나 뿌듯하든지.
인터넷 레시피를 보고 만든게 아니라,
당근 회원님들과 홈파티 할 때 회원님 한분이 만들어준 등갈비 구이 레시피를
여러번 시행 착오를 겪으며 나 스스로 디벨롭한 것이라 뿌듯함이 배가 됨.
돼지갈비를 한 입 크기로 썰어서,
소금, 후추, 올리브 오일, 간장, 설탕, 꿀, 마늘을 넣고 조물조물 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전분을 넣고 조물조물한 뒤에
에어프라이어에 175도(설탕과 꿀이 들어가 180도 하면 탐)에,
13분(15분 하면 탐)돌리다가 뒤집어서 9분(10분 돌리면 탐) 돌리면 되는 아주아주 간단한 레시피인데,
진짜 짱 맛있.
엄마의 닭도리탕처럼 나도 나만의 레시피가 생겨 성숙한 어른의 길에 한 계단 오른 것만 같은 느낌.
4.
여튼 안봐도 비디오지,
나흘간의 추석 연휴 중 사흘은 아침부터
유튜브/넷플/쿠플을 돌려보다가 술먹다가 자다가 다시 눈떠서 술먹다 자는 폐인같은 생활을 반복햇다.
역시 나는 혼자 있으면 안되.
백수가 되면 더더욱이 안되.
최대한 회사 오래 다녀야지.
5.
이틀을 이렇게 지내고나니 위기감이 들어,
뇌를 정화하고자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을 보러 간만에 극장 나들이를 했따.
2주 후에는 넷플릭스에 풀린다지만,
상영시간이 세시간 가까이 된다길래 집에서 보면 집중해서 보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데뷔작 <오아시스> 때부터 그랬지만 이감독의 작품은 장편소설을 읽은 기분이 들 정도로
항상 서사와 장면의 밀도가 높은 편인 것 같은데,
이번에도 세시간 가까이 전혀지루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못하고 봤네.
담담한 연출인데도 이렇게 흡입력이 있다니 주연 배우들의 연기력도 있겠지만,
오히려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배우들의 단독씬에서도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연출능력이 대단하긴 한 것 같다.
간만에 해고 노동자들을 다른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은근 마음이 불편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어렸을 때와 달리 그들을 완전히 타자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나는 계급이 달라, 그들의 계급에 속하고 싶지 않아 라는 우월감과 불안감이 공존하는 것이
현재의 나 자신임을 꺠닫게 되다보니,
자연스레 나름 진지하게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만 같은 대학 시절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면서
언듯 정체성에 혼란도 오고,
더욱 무서운 것은 어쩌면 대학생 떄조차 나는 지금과 같은 우월감과 불안감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고 해한 거지.
확실한 것은 대학생 떄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희미하고 손이 잘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6.
그리고 영화 예매할 떄보니
19금 영화라 신분증 확인한다고 대문짝하게 써있길래,
초반부터 조인성과 전도연간 성적 긴장감도 느껴지고 해서
넘 야한 장면 나올까봐 웬지 긴장하면서 봤는데
세상 담백해서 이게 당최 왜 19금이지 할 쯤에,
전도연이 갑자기 옷을 벗고 바다로 뛰어들길래 수긍을 했음.
근데 전혀 예상을 못해서,
가뜩이나 조용한 영화관에서 혼자서 "어머어머"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지 모야.
갑자기 거침없이 옷 벗어서 깜딱 놀랐는데,
전도연이 그 나이에도 몸매가 넘 좋아서 두 번 놀람.
감독이 의도한 것은 전도연 몸매는 아니었겠지만 여튼 넘 부럽.
물론 그 뒤로 조인성도 같이 바다에 들어오고나서야,
그 장면이 이해가 됐지만 여튼 가장 인상깊은 장면이라 아니할 수 있음.
그 밖에는 전도연이 조여정 가방의 가격을 확인하는 장면이랄지,
고급진 옷을 지적하는 장면이랄지,
에..또...지금 생각해보니 첫 장면에서 아들이 하늘로 띄어올린 콘칩 빈봉지가,
맥없이 바닥에 떨어져 도로를 달리는 차들 사이에 짓밟히는 장면이라
영화가 비관적일건가 싶었는데,
끝장면은 또 달을 비추며 끝나는 걸 보면 그래도 나름 희망적 메시지인가 싶기도 하고...
역시 좋은 영화는 반추를 하게 만든다.
근데 내 뇌는 쇼츠에 이미 넘 녹아서 반추를 할 여력이 없다는것을 여실히 꺠달음.
7.
나흘째는 정신을 차리고 언니와 모닝 산책을 함.
코스모스 계절이 도래하였습니다.
가을이에요. 가을.
8.
산책을 마치고 동네 까페 와서 일하는 중.
언제나 그렇듯 명절 증후군을 극복하는 최고의 방법은,
출근 전날부터 일하는 것이다.
오늘도 할 일이 겁나 많아.
일은 언제나 겁나 많아.
다 내 탓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