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거 노인은 시간이 많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기혼자들은 아마 상상도 못할 정도일 것이다. 

사실 모든 독거인은 그런 것은 아니고 나는 확실히 시간이 남아돌 정도로 많다. 

결혼도 안했고 동거인도 없고 애인도 없고 친구도 별로 없으며, 

그나마 그 흔한 애완 동물 하나가 없다. 

고양이를 좋아하고 키워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무릇 생명체는 모두 소중한 법이므로, 

피애완묘를 위해 내가 직접 키울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럴듯한 취미도 하나 없고  집안일을 꼼꼼하게 하는 편도 아니며 

외모를 가꾼다덩가 운동을 한다덩가 하는 자기 계발을 하기에는 의지 박약이며, 

하다못해 재태크라도 열심히 한다던지 하는 미래에 대해 뭔가 꼼꼼한 계획을 세우고 대비하는 편도 아닌데다, 

살갑게 부모님을 챙기며 여기저기 모시고 다니는 효녀도 아니다. 

(일단 엄마아빠가 자신들만의 사교활동만으로도 넘 바빠서 나랑 놀아줄 시간이 없다.)

그래서 주말에는 영화보러 외출하는 것 외에는 주구장창 집에만 붙어 있다. 

다들 내 입장이 되보면 정말 나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있는지 깜짝 놀랄거다.

학기 중에는 그나마 학교라도 다니다보니 등록금이 아까워 억지로 수업도 듣고 숙제도 하느라 시간을 보낼 수 있는게 정말 다행이다.

근데 다음 학기면 이제 수업듣는 학기도 끝나고 논자시+논문 학기가 시작되니까 걱정이 태산이다. 

수업과 숙제야 정해지고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만 논자시 준비랑 논문은 정말 알아서 해야 하고 기약도 없는거라....스트레스만 받고 정작 준비는 안해서 시간만 허비하고 그렇다고 맘편히 놀지도 못하고 최악이야. 

여튼간에 방학을 맞은 나에게는 시간이 정말 많은데, 

처음 한달 정도는 좋다가도 곧 뭔가 인생이 표류한다는 느낌과 함께 정신상태가 흐릿해지면서도

세상에 뒤처지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증폭해서 우울해지곤 한다. 

여튼 불안과 우울을 안고서도 별다른 대책은 없이 딩굴대다가, 

너무 딩굴대서 물리적으로 허리가 아파오면 어디 밖이라도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동네 도서관에 가서 잔뜩 책을 빌려오곤 하는데,  오늘은 간만에 아주 재밌는 책을 만나서 시간이 밀도있게 지나갔는데 바로 이 책이다.


배우자도 자식도 칭구도 없는 나는 여름 휴가를 비롯한 각종 긴 연휴를 보내기 위해, 

정말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여행을 갈수밖에 없는데, 

천성의 게으르고 의심이 많고 낯을 가리며 변화와 소비를 싫어하는 나에게 여행이란 말이지,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사이에서 혹시 길을 잃을까, 여권을 잃을까 소매치기를 당하기 않을까 두근반 세근반하며 다리가 부러저라 돌아다녀야 하는 불편하고 힘들고 괴로운 시간 낭비일 뿐이므로, 

어디 갈때마다 집 떠난 걸 후회하고 내가 왜 굳이 이런 고생을 사서 하나 투덜대다 오곤 하는데, 

하도 남들이 여행이 좋네 어쩌네 하니까 정말 뭐가 그리 좋은가 하고 여행 에세이를 종종 찾아 읽곤 했지만, 

좀처럼 공감이 가지 않던 나날들이었는데, 

이 책의 작가는 여행에 대한 생각이 나와 비슷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말이지.

그리고 푸른 하늘이나 쪽빛 바다같은 흔들리는 행인들로 가득찬 거리 같은 톤다운된 컬러풀한 감성 사진 한장 없는 100%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여행 에세이라는 것도 맘에 들고, 

기본적으로 자학이나 투덜이나 비관이 짙게 깔린 문체도 완전 내 취향을 넘어선 어떤 동질감이 느껴졌는데, 

이 작가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결혼해서 애가 둘이라는 것 뿐이랄까..

다들 결혼했어. 나만 혼자야. 엉엉.


Posted by 물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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