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국제 자격증 셤을 보러 갔다.

작년 이맘때쯤 본사에서 예산 남았다고 해서 백만원쯤 하는 응시료를 내준다길래 올타구나 하고 신청했는데,

신청 후 1년내에 시험을 봐야 하건만 1년내내 판판히 놀기만 해서 미루고 미루다

올해 남은 유일한 응시일이라 귀찮음을 무릎쓰고 시혐을 보러 갔다.

시험일 전날은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은혜로움에 힘입어

교재나 관련 자료를 단 한장도 들쳐보지 않고 판판히 놀았기 때문에

시험 합격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없이 시험 완주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당연히 시험은 떨어졌는데 공부를 단 한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150분동안 영어로 된 90개의 질문을 끝까지 풀어낸 스스로가 기특할 뿐이었다.

비록 시험이 생각보다 쉬워서 교재나 관련 자료를 한번만 정독했어도 붙었을 것 같긴하던데, 

연말이 되니 넘나 지쳐서 회사도 겨우 다니는터라 도저히 공부를 할 에너지가 엄더라구.

여기서 이상한 포인트는 내일이 시험인 줄 알면서도 시험 전날 판판이 놀아제꼈다는 점이 아니다.

시험 시작이 오전 8시부터라 혹시나 늦을까봐 6시30분경 집을 나설 때 이상한 조짐은 시작되었지.

 

2년쯤 전에 샀는데 도통 안 입는 패딩을 버리려고 몇달깨 시도 중인데

그 흔하던 의류 수거함이 집근처에 하나도 없더라구.

그래서 그걸 옷걸이에 걸지도 못하고 손바닥만한 거실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있던 와중이었지.

지하철 역 근처에 의류 보관함이 있는 걸 봤던 것 같아서 거기에 버려야지 하고 그걸 가지고 집을 나섰지.

그런데 내가 기억한 장소에 의류 보관함이 엄는고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패딩 점퍼를 들고 지하철을 일단 타고 선반에 올려 두었지.

하루 종일 패딩을 들고 다니기가 뭣해서 선반에 버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릴 때가 다가오니 도저히 버려두고 못가겠는거야. 

지하철 탄 사람들이 누군가가 버리고 간 패딩을 보고 괜히 신경쓸까봐 신경쓰이고, (아니 아무도 신경 안 쓸텐데)

역무원이 됐든 청소하시는 분이 됐든 지하철 선반에 버려진 패딩을 주워다 지하철 유실물 센터에서 보관하고 관리하는데 드는 누군가의 수고로움도 괜시리 미안해지고....(아니!! 그분들은 그냥 일을 하는건데 뭐 미안할 것 까지!)

지하철에 선반에 버려져서 하루 종일 지하철 타고 뻉뻉 돌 패딩도 불쌍하고(일단 2호선이 아니라 뺑뻉 돌 일도 없는데...아니아니..그게 아니라 누가 패딩을 불쌍해하냐고!!!!)...

이런저런 상념 끝에 결국에는 패딩을 버려두지 못하고 꼭쥐고 지하철에서 내린 내가 꼭 정신병자 같은거야. 

그래서 이번에는 지하철 벤치에 버리고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플랫폼 가운데 있는 벤치에 과감하게 패딩을 버리고 발걸음을 옮겼지. 

그런데 이번에도 패딩이 불쌍하고 지하철 승객의 신경쓰임과 역무원의 수고로움이 신경쓰여서, 

결국 몇 발짝 가지 못하고 다시 벤치로 돌아와서 패딩을 주워들고 말았던거야.

이쯤되니 내 스스로도 내가 너무너무 이상한거야. 

그깟 입지도 않는 패딩 하나 개운하게 버리지 못하고 결국 발걸음을 돌아서는 나라니. 

이건 정말 등신이 아니냐 말이지......라는 실존적 고뇌를 안고 계단을 오르고 개찰구를 지나 시험장이 있는 출구로 향하는데!!!! 운명처럼!!!! 정말 거짓말 같은 운명처럼!!! 노숙자!!! 그것도 여성 노숙자를 마주치고 만 것이다!!!! 두둥!!!

평소에 노숙자를 잘 마주치는 편도 아니지만 이번처럼 노숙자가 반가운 것은 정말 첨이었다!!!!

하지만 막상 마주쳤을 때는 말을 걸 용기가 엄서서 일단 지나쳤는데

지나가면서 흘깃 보니 입고 있는 옷 보다는 일단 내 패딩이 더 따뜻해 보이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더라구.

그래서 아무리봐도 운명인 것 같아서 부랴부랴 다시 그녀를 찾아 다녔지.

마침내 다시 만난 그녀에게 조심스레 옷을 거내며 용기를 내어 이거 입으시겠냐고 물어봤더니

그녀가 일단 옷을 받아 들고는 살펴보더라구. 

혹시라도 맘에 안 든다고 할까과 그 분 앞에 손을 단정히 모으고 서서, 

옷 자체는 디게 멀쩡하다고 주절주절 부연 설명까지 했지 모야. 

다행히 크게 흠결은 없었던지 본인이 입겠다고 해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설 수 있었어.

패딩을 둘러싼 삶의 고뇌가 사라지고 나니. 

어찌나 맘이 가벼워지던지 그 힘으로 시험도 완주할 수 있었고

시험에 떨어져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으며

보기 드물게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바바. 얼마나 이상해. 

이상하지만 소중한 나...라고 다양한 형태의 자존감 높이기 컨텐츠에 나와 있는 말을 작게 읊조리며 글을 마친다.

Posted by 물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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