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고도
만성 불안증과 연휴 한정 권태로움을 이기지 못한 나는
어제 마침내 드디어 배달 알바를 시작했음.
여러모로 느끼는게 많았음.
1. 어려운 점
배달 초보자로써 당연히 내가 아는 경로에 있는 배달 건을 배차 신청했다.
음식점은 내가 테이크아웃을 위해 방문해봤거나 지나가면서 본 곳에서 나오는 콜만 잡았다.
이렇게 쉬운 건수만 잡았음에도 예상외로 난관은 배달 요청자의 집에 방문하는 거였다.
대부분이 아파트였는데 아파트마다 진입 경로나 배달정책이 다 달랐기 때문에
아파트 단지에 진입하더라도 정학한 배달 장소로 가기 위해
진입로나 엘베를 찾는데 여러번 해멨다.
특히 첫 배달 장소는 지나가면서 보기만 했던 고층 주상 복합이었는데,
신분증을 맡기고 엘베 키를 받아 키를 대고 층을 눌렀어야 하는데
이걸 몰라서 엄청 헤맸더랬다.
2. 욕설
1km이내 평지 이동 및 20분 이상 배달 시간이 남은 콜들로 엄선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장소에 도착해야 한다는게 엄청난 압박감을 주었음.
첫 배차 신청을 한 건은 과일 주스 배달 건이었는데
픽업한 까페에서 배달지까지 8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되는
진짜 가까운 건이었음.
그런데 주상복합이라 단지가 넓고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혹시라도 늦을 까봐 조급한 마음으로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30대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횡단 보도를 건너다 혼자 내 쪽으로 비틀거려서
약간 부딪힐 뻔 했는데
대뜸 어딜 이쪽으로 건너~ 이 아줌마가~하고 대뜸 짜증을 냈음.
물론 원칙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넌 내 잘못이 있는 거지만
멀쩡히 걷다 갑자기 내쪽으로 비틀거린 건 그쪽인데다
아무래도 주사 부리는 것 같고 늦을까바 조바심이 난 상태여서
나도 지지 않고 아무래도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정신머리 챙기고 다니라는 요지의 말을
쫄아서 차마 자전거를 세우거나 뒤돌아보지 못하고
자전거를 밟으며 다소 거칠게 전달했더니 여자애가 완전 빡쳐서
야. 거기 안서..이 x년아 하며 8차선 도로 한가운데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음.
여자애가 쫓아올까바 겁나 페달을 밟아 내빼는데
이 애가 얼마나 소리를 질러댔는지 배달장소인 주상복합단지로 진입하고서도
여자애 소리가 계속 들림.
주사가 확실했음. 여튼 무서워따.
3. 성선설
인터넷에 워낙 배달 진상들 애기가 많아
나도 진상 만날까봐 엄청 쫄았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엄청 친절했다.
처음 배달 간 주상복합 엘베에서 층이 안눌러져서 당황하다
엘베에 같이 탔던 아자씨에게 9층 어케 가냐고 물어봤더니
자신의 키를 대고 9층을 눌러주셨음.
두번째 배달 간 데서는 배달 장소를 찾아 헤매서 2~3분 늦은 관계로
엄청 쫄아서 엘베 타면서 늦어서 죄송하다고 올라가고 있다고 애기할 요량으로 전화를 했는데
전화 받자마자 주문자 분이 '아이고~고생 많으십니다~'하고 인사를 해주셔서 엄청 감동했다.
여튼 주문자 분들이 모두 친절하게 받아주셔서 고마웠음.
그리고 픽업하러 간 까페에서도 좀 일찍 갔더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넘 바빠서 그랬다고
까페 여사장님이 엄청 미안해하셨음.
인터넷에 올라오는 배달 진상 건들은
주작을 가능성도 높은데다 워낙 자극적이고 예외적인 건들만 올라오는게 맞는 것 같음.
배달만 그렇겠냐. 대부분의 인터넷 화제 건들이 다 그런거 아닌가 싶음.
분명 IT 산업 초기에는 정보통신망이 정보의 유통과 사람들간 상호 작용을 활발하게 한다는 장점이 있었는데
산업이 고도화될 수록
너무 많은 정보들 사이에서 가치있고 유의미한 정보가 묻히는데다
왜곡되고 자극적인 정보들만 유통되서
개인화에 의해 노출되는 정보 자체도 제한되면서(필터버블)
인류의 지성을 후퇴시키는 국면에 접어든게 확실한 것 같음.
4. 다양성
3건 중 2건이 까페에서 500미터내 아파트로 음료나 디저트를 배달하는 건이었음.
아니 이정도 거리면 배달료 내느니 그냥 포장해서 먹는게 낫지 않나 싶었는데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음식들을 다양한 거리에서 시켜 먹는 걸 알게 됨.
글구 디저트같은 여성 취향의 메뉴들도 배달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은 30대 남자들이었고 친절했다. .
그래도 배달자 입장에서는 비대면 배달이 젤 속편함.
그리고 도통 갈일이 없는 다양한 가게와 거주지들을 방문하다보니
콜이 많이 뜨는 가게는 왜 장사가 잘되는가 궁금하기도 하고
부동산의 입지에 대해서도 뭔가 정보가 쌓일 것만 같음.
5. 인기 품목
치킨 배달이 가장 많을 줄 알았는데,
콜 뜨는 걸 보면 이야. 엽기 떡볶이 배달이 정말 엄청엄청 많았음.
아니 어쩌다가 이 나라는 전국민이 이렇게 떡볶이에 열광했는지 놀랍기 짝이 없음.
6. 폭주
자전거 배달로는 간당간당할 떄가 많은게
배달 음식을 픽업하고 배달까지 남은 시간은 보통 12분 많아야 15분 정도인데
첨 가는 아파트에 진입로나 통로 찾느라 어영부영 헤메는 시간을 대략 3~5분 잡으면
보통 9분안에는 목적지까지 도착해야 하는데
자전거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고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져서 험하게 운전하게 됨.
7. 후유증
여튼 배달 알바는 생각보다 괜찮았음.
첨 하는 경험이다 보니 보고 듣는게 새로웠고
아직 진상을 안 나서 그런지 생각보다 재미도 있었음.
무엇보다 무기력하게 집에 누워있는니
운동도 하고 돈도 번다는 점에서 심적으로 뿌듯한게 크고
자꾸 중독성이 생김.
그래서 누워서 하릴없이 인터넷 서핑하지 않고
자꾸 배달 콜 뜨는 걸 하릴없이 보고 있게 됨.
글고 무엇보다 뭔가를 사거나 계산할 때
자꾸 배달 단가로 계산하게 되게 됨.
그러니까 영화를 보려고 해도
어머 이 티켓값이면 도대체 배달 몇 번을 뛰어야 되는거야....하는 생각이 자꾸 듬.
8. 시간의 가치
그렇게 한시간 반정도 만에 4건을 해서
총 16700원을 벌었음.
배달 단가는 보통 3500원~4500원 사이로 꽤나 높은 편이었음.
그래서 PT 연장 하지 말고
그냥 배달로 운동할까 싶기도 함.
얼마나 효율적이야. 돈 받으며 운동 하고.
그런데 한편으로는 푼돈에 연연하지 말고
뭔가 시간을 가치 있게 써야 하는게 아닐까,
생산성 향상에 매진해야 하는게 아닐까 (이를테면 영어 공부) 같은 생각이 들지만
내가 배달 안하는 시간에 누워있기만 하지
뭐 그리 얼마나 생산적인 일들을 하냐 말이야.
애초에 내가 여가 시간에 하는 일들 중에
플랫폼 노동자로써 생산하는 가치 이상의 가치 생산을 담보하는 것들
(이를테면 양육을 통한 사회 구성원의 재생산 등)이란게 있냐 말이야.
내 자발적으로는 그런 의지와 역량이 도통 생기질 않잖아.
그러느니 차라리 배달이 훨씬 낫지.
요즘같은 시대에 플랫폼 노동자로 살아가는거야 말로 얼마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애초에 적성에도 맞지 않는 독서클럽 따위로 사람을 사귀어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나랑 안 맞는 거였어.
그냥 배달하면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다니는게 더 낫지 않나.
그리고 아직 40대니까 배달이라도 하는거지,
더 늙어봐라 이마저도 못 한다.
9.
그래서 배달의 한길로 나서겠다!고 크게 맘 먹었는데
막상 집밖을 나가는게 너무 귀찮아.
어제는 그나마 낮술 먹고 술김에 에너지가 일시적으로 생겨서 한 건데
맨정신에 하려니 역시 너무 귀찮아.
픽업부터 배달까지 총 이동기간이 1KM도 안되는 꿀 콜을 마냥 흘러 보내는 나를 보노라면
역시 배달이라도 제대로 하는게 인생을 그나마 부지런히 사는 거였어.
10.
몇개월 전에 틴더에서 외국계 회사 CFO인데
퇴근 후에 운동삼아 배민 알바를 하고
그렇게 얻은 소득은 모두 기부를 한다는 사람이 멋져보여서 만난적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