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
주말의 대부분을 스스로의 커리어를 돌이켜보며 자소서와 인터뷰 답변 작성에 소진하다보니
(그 와중에 알바 하나는 끝냈지만)
암만 생각해도 이 대단한 커리어로도 지금 회사에서 시궁창같은 대접을 받고 있는 현실이 다시금 믿기지 않는 한편,
이깟 영어 실력으로는 어디도 못 갈 것이며 어디 가더라도 등신이 될 것이 분명하기에
영원히 이 시궁창속에 파묻혀 살까봐 무한한 불안이 밀려와서 호흡곤란 같은 신체적 이상 증상까지 유발되었다.
어찌나 자소서가 안 써지던지, 이에 비하면 보고서와 해설서 같은 건조한 지식의 나열은 얼마나 쉬운 편이냐 말이다.
내 생각과 주관이 들어가야 하는 논문이 힘들고 나 자체에 대한 써야 하는 자소서는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걸 보면,
단순히 고객님의 니즈와 가이드가 구체적인 오더없어서라는 것도 원인이겠지만 근본적으로 내가 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물욕과 성욕만 가득했었는데, 불가피하게 성욕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이젠 식욕이 대체했을 뿐,
욕구와 욕망만 그득하고 도통 생각이라곤 없는 나는 자존감이 참 낮은 사람이라는 관점으로 자기 소개서 쓰면 진짜 금방 쓰겠구만!!!
나는 내가 불쌍하다.
그 중에서도 아직도 세상 쓸모없는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게 젤 불쌍해!!!
이젠 알아. 이대로 죽겠지. 죽을 때도 내 스스로를 불쌍해하며 죽겠지.
충만한 인생이란 무엇일까. 정말 고양이라도 키워야 하나. 아냐 다 부질없지 모.
2. 올림픽 공원 맛집
최근 개업한 곳인데 맛이 대단히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주인장의 성의가 느껴지는 좋은 식당이며 어리굴젓이 정말 맛있습니다. 여럿이 가면 추가 주문해서 두번 먹으셈.
내가 한 10년전쯤에 동네에 '뽕신'이라는 식당이 처음 생겼을 때 아 이 집은 대박나겠다라고 생각한데 이어 두 번째로 아 이 집은 대박나겠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울 동네에 좁디좁은 김밥천국의 반도 안되는 규모로 시작한 뽕신이 그 뒤로 얼마나 급성장 했는지 정말 대단하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오늘도 가족들과 갔는데 남녀노소 누구나 다 만족만족.
이거저거 다 맛있으므로 반드시 순대국밥은 1개 덜 시키고 오징어볶음이나 육회+공기밥 시켜야 함
https://store.naver.com/restaurants/detail?entry=pll&id=1111611853&query=%EC%B2%AD%EC%99%80%EC%98%A5
청와옥 : 네이버
리뷰 721 · 생방송투데이 243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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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드랙퀸
유튜브 컨텐츠 중 점차 시청 점유일이 낮아지고 있는 먹방의 자리를 유튜브 자리를 드랙퀸이 채우고 잇음.
진짜 먹방을 하루에 3~4시간씩 봤더니 본만큼 볼 건 같아.
이제 도로시가 아무리 우걱우걱 게걸스럽게 닭다리를 뜯고 중국 당면을 쭈압쭈압 빨아대도,
쯔양이 여리여리한 몸집보다 훨씬 더 커보이는 고기덩어리들을 쌓아놓고 꾸역꾸역 먹어대도
나에게 아무런 자극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드랙 퀸은 여전히 넘 멋져.
그래서 드랙퀸 컨텐츠에 감흥을 받아 독서 클럽에 아래와 같은 글도 썼다.
제목 : You make me wonder?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독거 노인에게 팟캐스트와 유튜브는 공간의 적막함을 채우기 위한 일상 필수템이다. 특히 올해부터 부쩍 보기 시작한 유튜브가 일상에서 시간을 빨아들이는 속도는 그야말로 경이로울 지경이다. 잠깐 정신줄을 놓고 있노라면 한시간이 반나절이 때로는 한나절이 훌쩍 가버린 경우가 허다하다. 불과 이삼년전에 대학 후배 중 하나가 구독자 수백만명인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월 억대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먹방 유튜버들이 유명세를 탄다고 해도 갠 돈 많이 벌어 좋겠다라거나 먹방이라니 참으로 세상에는 할일 없는 사람들 많구나하고 나와는 거리가 먼 애기로만 여겼다.
분명 유튜브 이용 초기에는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된 영상을 우연히 보거나 궁금한 영상만 찾아보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일단 누웠다하면 뭐 잼난거 없나 하고 유튜브부터 켜고 보게 되었다. 나는 대부분의 일상을 누워서 보내는 관계로 결국 대부분의 시간을 유튜브 시청에 할애하게 되는 셈이다. 단순 시간 활용만이 아니라 먹방 유튜버가 리뷰한 음식을 한두달의 기다림 끝에 받아서 먹어보기도 하는 등 유튜브는 텅 비어 있는 내 일상 틈틈이를 빠르게 잠식해왔다..
매운 음식을 잘 먹어서 유명한 먹방 유튜버 도로시의 컨텐츠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니 저렇게 예쁜 여자가 저렇게 망가져가며 우걱우걱 닭다리를 뜯고 우악스럽게 게다리를 쪽쪽 빨고 중국 당면을 쮸압쮸압 땡기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아름다운 얼굴과 게걸스러움의 기묘한 언밸런스가 그야말로 문화 충격이었다. 지금은 구독자 떡하락 중에 있긴 하지만 유튜버 슈기의 영상을 처음 봤을 때도 사람이 저렇게까지 귀여운 척 오바를 떨 수 있는 거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누가 이렇게까지 오바하며 귀염 떨면 일단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그녀는 오히려 꽤나 얌전한 편에 속한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먹방을 중심으로 간간히 화장품과 명품 리뷰 방송을 보아가며 마냥 산뜻해보이는 각종 직업군의 브이 로그에서 고시원의 핍진한 브이로그, 밤세계 사람들의 각종 썰들, 부부 갈등 이야기 등 세상에 대한 많은 간접 경험들을 유튜브를 통해 접했다. 그런데 과유불급이었던지 처음에는 그토록 충격적이었던 먹방도 시들해지고 명품은 여전히 나와 별 상관 없고 아무리 산뜻한 일상을 보아도 내 일상은 전혀 산뜻해지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던 즈음이었다. 추천 목록에 한동안 드래그 퀸 메이크업 영상이 떠 있었는데 전혀 관심사가 아니어서 보고 있지 않다 워낙 볼게 없었던 어느 주말 시덥잖은 기대로 추천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황금과 같은 주말의 5시간 가량이 어느새 지나가 있었다. 나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는 정말 드래그 퀸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원래 나는 드래그 퀸에 대한 막연한 호감이 있기는 했다. 비록 드래그 퀸을 실제로 한번도 본 적 없지만, 섹스앤더시티같은 미드나 영화에서 간혹 드래그 퀸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과장된 메이크업과 호들갑스런 애티튜드로 대표되는 극단적 여성성에 알 수 없는 호감을 느꼈더랬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이면에는 나의 부족한 여성성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여성적 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니까 여성성이 과장된 드래그 퀸들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생물학적 여성의 지난친 여성성은 반감이 들기도 한다. 아마 진화심리학상 본능적으로 여성은 번식의 경쟁자인데 어쨌든 드래그 퀸은 성별은 남성이라 번식의 경쟁자는 아니어서 더욱 편안하게 느끼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성 정체성상 메이저 그룹으로써 마이너 그룹을 보며 느끼는 위선적 우월감이 저변에 깔린걸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드래그 퀸 컨텐츠를 소비하는 것이 즐겁고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마이너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스스로가 웬지 힙한 것도 같아 내심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캐나다인 영어 선생님에게 이태원의 드래그 퀸 바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공연도 찾아다녀야겠지 하고 새로운 관심사를 찾아 잠깐 즐거웠더랬다.
그런데, 어제 브라운이아드걸즈가 <You make me wonder>라는 신곡의 뮤직 비디오에 드래그 퀸들을 대거 출연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명 가수의 뮤직 비디오에 드래그 퀸이 출였했다면, 잘 드러나지 않은 보석같은 마이너 문화를 내 스스로 발견했다기 보다는 드래그 퀸은 이미 한참전부터 유행 중이었고 나는 그냥 유행에 노출된게 아닌가 싶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나는 이전에 유튜브를 통해 드래그 퀸 컨텐츠를 한 번도 소비한적이 없는데 왜 드래그 퀸 컨텐츠가 유튜브 추천 목록에 떴을까? 드래그 퀸 컨텐츠를 만난 건 내 의지일까 유튜브의 알고리즘일까? 맞춤형 광고에 빅사이즈 의류 쇼핑몰 광고가 자꾸 뜨는 것도 좀 기분이 나빴는데 이 알고리즘은 나를 한번도 본적이 없으면서 내 체형 뿐 아니라 내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했던 관심사와 멘탈리티까지 파악하고 있다니 좀 으스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특별하다며 자신을 좀 봐달라고 온 세상에 목놓아 외치는 나르시즘 과잉의 시대이다. 그런데, 정작 나를 Wonder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는 막상 알 수가 없는 혼돈의 시기이도 하다. 넘쳐나는 막대한 정보들 중에서 보고 먹고 사는 행위를 통해나 스스로를 좀 더 Wonder 하게 느끼게 된 과정은 순전히 나만의 의지인가? 신의 계시 혹은 우연같은 운명인가? 알고리즘의 뜻인가? 기술 발전은 이미 인류의 필요를 넘어섰고 조만간 인류의 통제를 벗어날 지도 모르겠다. 바둑에 이어 각종 온라인 게임에서도 인류를 연이어 격파하고 있는 알파고 시리즈의 의사 결정 과 학습 과정은 이미 개발자들도 파악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한다. 알고리즘이 우리의 취향과 관심사를 정해주는 주체성 소멸 시대의 초입에 문명이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이것이 제 박사 논문의 문제 의식입니다. 여러분. 뭔 말인지 모르겠죠? 쓰는 저는 어떻겠습니까......
이거 모티브가 된 브아걸 뮤비
왼쪽이 나나 영롱킴. 내가 젤 좋아하는 그리고 한국에서 젤 유명한 드래그 퀸이다.
오른쪽은 밤비라고 소속사 사장임.
4.
그래서 내가 쓴 글을 가지고 독서 클럽에서는 사람들은 왜 먹방을 보는가에 대해 애기를 했는데,
나는 도통 제대로 된 근사한 답변을 내어놓지 못했건만,
어떤 사람이 파괴 본능인 것 같다구, 음식이 파괴되고 음식을 먹는 사람이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느껴지는 만족감이라고 하던데 엄청 그럴듯해서 평소 똑똑한 남자 좋아하는 나로써 훌쩍 반할 뻔 했는데,
근데 개가 나랑 띠동갑이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