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

카테고리 없음 2024. 9. 12. 20:28

의뢰받은 원고 하나가 몇 주전 릴리즈 되었다. 

내가 웬만하면 마감기한은 칼같이 지키는데, 

이번 원고는 어찌나 안써지든지, 

마감기한을 무려 두 번이나 연기할 정도였으며,

그나마 최종 납품물의 퀄리티도 엉망진창인 원고라서,

진짜 누가 볼까 넘나 부끄러웠음.

그래서 릴리즈된 것도 당연히 전혀 읽지를 않았고,

(파일도 안 열어봄) 

혹시 누가 그거 봤다고 연락할까봐 완존 두근반세근반하면서 지낸 것도 벌써 몇주 되서, 

나조차도 기억에 잊고 있었지. 

아니 근데, 오늘 업계 사람 한 분이 원고 봤다고 연락이! 기어이!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사실 원고 의뢰받을 때와 원고 납품할때 내가 소속이 달라진데다, 

그때는 회사 이름 정하기도 전이어서 소속 쓰기가 애매했는데 

발주처가 '전' OOO 이사로 나가는건 어떠냐고 해서 진짜 좋은 생각이라 하고 그렇게 나갔거덩.

근데 그거 보고 왜 '전'이냐고 연락이 온 거였음. 아하하. 

아하하. 아하하하하하핳ㅇ.  

그래서 여차저차 이런저런 사정, 지금은 패턴화된 아래와 같은 대화를 해따. 

- 회사 관둠

- 근데 짤린 거 아니고 내가 건강떔에 관둔거임!!!!!

- 근데 사실 나는 월급쟁이가 꿈이라 아쉽긴 함. 

 (네가 보기엔 내가 사실상 짤린거같다면 그건 또 나름의 진실일 수 있지)

- 그래서 지금은 후리랜서로 쉬고 있음

- 근데 개백수까지는 아니고 간간히 알바는 하고 있음

   (내가 그래도 이바닥 고인물이니까 내가 백수라고 막 막 무시하고 그러지는 마라). 

- 알바하려면 소속이 필요해서 명함 팠음, 

  (이쁘지~^^, 내가 AI랑 만든거당. 데헷). 

- 나는 못나서 짤렸지만 너라도 잘 살아라. 

 

근데 위로인지 립서비슨지 뭔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이 그 개떡같은 원고가 괜찮았다고 

그래서 자기 상사한테 보라고 전달했다고 애기해줘서 기부니가 좋았음. 

 

그니까 그냥 단순히 립서비스 땜에 기부니가 좋은게 아니라, 

내가 이 바닥에서 뭔가 하고 싶은게 있고,

그게 예전 회사에서 자유롭게 할 수 없으니까 관둔것도 분명히 일말의 진실이거덩!

근데 막상 회사를 관두니까,  

실직한 상황 자체도 받아들이기 힘든 내가 과연 그 정도의 역량이 있는 사람인가, 

끊임없는 자기 의심과 회의에 시달렸거덩. 

근데 남들에게 이렇게 한번씩 연락와서 립서비스일지언정 좋은 말 해주면, 

착각이라도 혹시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는 것 같다. 

 

Posted by 물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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