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0

감상 2018. 10. 17. 08:22



오로지 지하철 출퇴근길에서만 읽은지 3일 정도만에 완독하게 되었다.

출퇴근길의 지하철은 정말 책읽기 좋은 장소다.

책과 함께라면 비단 지하철 안이 아니더라도

같은 역이라는 게 무색한 잠실역 2-8호선의 길고 긴 환승 거리도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이 책은 소설가 조경란의 산문집이다. 

조경란은 결코 내가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역량있고 노련하여 한국 문학계에 나름 단단한 입지를 가진 중견 작가라는 점은 누구나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튼 이런 류의 소설가들의 산문집을 몇 권 읽어봤는데, 대개는 전형적이라고 할 정도로 구성이 유사하고 이 책도 그렇다.


1. 특정 소재에서 출발(여행을 감, 그림을 봄, 음악을 들음) 

2. 해당 소재와 관련된 개인적 썰을 품 

  - 유년 시절 이야기

  - 가족 이야기

  - 작가 지원 프로그램으로 해외에 나갔던 이야기

  - 읽은 책 or 영화 or 음악 or 그림 이야기


이 책의 소재는 조경란 주변의 지극한 사소한 사물들, 

이를테면 달걀이나, 연필, 클립, 손수건 등등으로 시작해서, 

위와 같은 썰들을 돌려가며 푸는 것인데, 

소재 하나당 A4 한 두페이지 정도로 간략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지하철에서 읽기 참 좋았다.


산문집이라 당연히 개인적 서사가 많이 들어가 있는데, 

순전히 산문집에 나온 내용만으로 조경란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책의 내용만으로 재구성한 것이므로 사실과 다를 수 있다)


조경란은 50대의 소설 작가인데, 부모님과 함께 관악구에 거주하고 있다. (작업실도 관악구)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사람은 모름지기 (1) 신발이 깨끗해야 한다 (2) 신문을 읽어야 한다 등등을 설파하셨다는 걸로 봐서는 꽤나 주관이 뚜렷한 지적인 분인 것 같고, (그래서 아직도 조경란은 종이 신문을 읽는다고)

어머님의 화양연화가 세 자매의 소풍 도시락 싸는 시절이었다고 하는 걸 보면 어머니는 평범한 헌신적인 가정주부였던 모양이다.

고등학교때는 공부에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평범한 학생이었던 듯 하고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입시에 연달아 실패하며 방구석에 틀어박혀 책만 들입다 파는 암흑기로,

찬란했어야 할 20대 초반의 몇년간을 우울하게 보냈고,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학원에서 가구 디자인 기술을 배워 가구 디자인 회사에 취직했는데,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아 그나마도 몇개월만에 때려치고는 

소설에 대한 열망을 불현듯 깨닫고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문창과 비슷한 곳으로 대학 진학을 했다고 한다.


그 뒤는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네임드 전업 소설가로 나름 승승장구하고 있으며, 

네임드 전업 소설가가 대개 그러하듯 문창과 교수도 겸임하고 있고, 

네임드 전업 소설가가 대개 그러하듯 국가의 창작 지원 활동의 일환 내지는 강연 등으로 인해

프랑스, 로마, 중국, 미국 등 다양한 나라를 여행하고 몇 개월 정도는 체류하며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작가들과 교류한 경험이 있고 

문구 덕후이자 조카 덕후이며 미술과 와인 애호가이고 취미는 요리이다.

(조카 덕후에 대한 부분은 비슷한 입장이라 그런지 조카를 좋아하는 노처녀란 미처 실현하지 못한 모성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여서 어떻게 해도 쓸쓸하고 처량해보이는구나 싶었음.)


역시 프로 소설가 답게 전체적으로 말과 문장의 리듬을 살리면서도 담담하고 노련하게 써 내려간  산문집인데, 

다 읽고 나니 역시나 소설가란 족속들은 역시나 감수성이 예민하고 말이 많은 종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말해 옆에 있으면 피곤하기 짝이 없을 것이며 그 중의 최악은 배우자가 아닐까 싶다.

다소 과장을 보태자면 예술가들은 자기 파괴는 물론이요, 주변의 양기마저 빨아들여 작품으로 승화하는 흡혈귀 같은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도 지하철 안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잘 읽었다. 

몇 번 애기했지만 나는 외국 문학보다 한국 문학을 훨씬 좋아하는게

문장력이나 글의 밀도가 아예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을 읽으면 종종 뭐든 문장을 만들고 싶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절로 생긴다. 

문장을 만들고 그 문장을 정리하고 다듬어 가는 과정이 주는 순수한 쾌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 소설을 읽으면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거의 없지. 

모국어가 좋은게 이런거겠지.

그럭저럭 재미있게 잘 읽었지만 조경란 팬이 아니라면 추천하지 않음. 


몇 가지 인상깊은 대목을 짚어보자면, 

주로 글쓰기에 대한 챕터인데, 

<볼펜> 편에서 모 하바드 교수가 '매일 10분이라도 글을 써야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한 내용을 인용한 부분이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생각과 고민을 해야하는데 생각을 하려면 역시 글쓰기만한 것이 없는 게 만고 불변이 진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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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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